여전히 정치에 관한 이야기하기를 싫어하는지라 이 글을 쓸까말까 한참을 고민을 했습니다만...그래도 제 설익은 생각을 지금 남겨두고 훗날 읽을 요량으로 몇 자 기록해둡니다. 그때 열라 후회할지도.
과거에도 좋아하지 않았고, 며칠 전까지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슬프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출신의 한계와 배경의 한계를 뻔히 알기에, 그리고 한국정치 풍토에서 그 배경이라는 것이 족쇄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기에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부터 지독한 회의론적 시각으로 그를 봤습니다. 결과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쥐새끼 ㅈ만큼도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자신은 비록 옳고 집단이 잘못되었더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비난을 받으면 불편하게 마련입니다. 집단과 개인을 일치시켜 다른 집단의 개체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것이죠. 저 역시 한국인이지만 한국 사회를 지독히도 싫어합니다. 단지 정치적인 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교육 등 곳곳에 숨어있는 썩어버린 - 이미 돌이킬 수 없는 - 근성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결국 누워서 침뱉기지만. 1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변화하다.
개인적인 지론이 있다면 '교육으로도 안 되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 고로 삶은 선해지는 과정이다.'라는 겁니다. 한국도 변하고 있지만 서양의 교육 현장에서는 절대 체벌은 없습니다. 말로 해서 안되는 이는 경고를 하고 경고를 해도 안되면 정학이나 퇴학류의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즉 알아서 개선하라는 의미죠. '니 인생 니가 알아서 관리해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한국도 점차 그런 분위기로 바껴졌습니다.
가요의 가사를 봐도 이런 사회적 감정적 분위기의 변천은 뚜렷합니다. 90년대 이전에는 '그대는 누구시길래~'등의 가사였다면 이후에는 '난 알아요.'식의 나를 중심으로 한 감정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그대와 나의 이야기에서 나와 그대의 이야기로 인식체계가 바뀐 것이죠. 내가 중심이 된 사회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밀레니엄 이후 인터넷은 급속도로 퍼지고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하여 젊은 세대들에겐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각과 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정치 풍토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참여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부정이 반복되다.
이런 풀뿌리 정치, 참여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것까진 좋은데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어느 여대생은 늙은 참전 용사들에게 '당신들때문에 통일이 안 됐다'고 악을 쓰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얼룩진 과거 청산, 말은 좋은데 이게 심하다보니 과거에 대한 단절까지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청산, 우리 민족의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인 이 과거를 뇌리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이런 생각은 과거의 모든 행적을 파헤쳐 비난하고 부정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은 고려대 설립자인 김성수를 친일파라 규정짓고, 연세대 설립자인 백낙준의 동상철거를 요구했습니다. 사실 해방 이후 가장 극렬하게 친일파 청산을 들고 나선 단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입니다. 박헌영이 자칭 '인민공화국'을 설립하면서 초대 문교장관으로 김성수를 추대한 일은 유명합니다. 그만큼 김성수나 백낙준은 음으로 독립운동에 많은 지원을 했었습니다. 이런 양면을 보지않고 그저 표면만으로 친일파라 규정짓고 과거를 부정한다면 한국의 모든 대학들은 다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대한 단절과 부정. 2
반성없이 과거를 비난하다.
부모님 세대를 보면 전쟁 이후 폐허에서 지금의 경제규모로 만들어 낸 기적의 세대입니다. 머리칼을 잘라서 가발로 팔고, 환경미화원들이 모은 은행을 팔고, 심지어 중풍치료제인 유로키나제를 모으기 위해 오줌까지 수거해서 수출했었습니다. 전후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놀라는 이들은 전후 한국의 한강의 기적에 몇 십배 경악을 했었습니다. 그런 급속한 경제 발전 이면엔 권력과 기업의 유착이 생기게 마련이었습니다.
이런 과거의 업적을 무시하고 잘못만을 들춰내어 과거사 규명이니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윗 세대가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친일 행적과 권력 유착으로 얼룩져 있는 과거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거에 대한 반성은 우리의 몫입니다. 히틀러 세대가 다 사라져도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반성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제서야 히틀러를 가지고 웃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얼마나 반성을 합니까? 아하! 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부모의 잘못이라구요?
나 외에는 다른 존재가 없나니...
인간이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하면 그 즉시 타인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나 외는 모두가 그릇되고 나 외는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도 포유류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식에의 사랑은 아직도 유지되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죠. '내 아이에겐 최고를 먹인다' '내 아이는 남과 다르다' '내 아이의 그릇됨은 친구 탓이다' 나의 자식만 인정합니다. 그럼 부모는? 부정합니다. 게다가 그 부모는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던 부모입니다. 더더욱 부정해야하죠.
나를 중심으로 내 이후의 역사만 존재할 가치가 있고 과거는 깡그리 무시하는, 경로사상은 20세기 유물이고 늙으면 죽는게 당연한 세상이 됩니다. 노약자석은 노련하고 약은 놈들이 앉는 곳이고 굼뜬 늙은이들은 통행에 방해되니 구석으로 다녀라고 이야기합니다. 전철에서 애들을 나무라면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악을 씁니다. '그 나이 될때까지 차 한 대 없이 뭐 했냐'는 소릴 하는 시대입니다. 이러다보니 초등학교 애들까지 개념 밥 말아먹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구세대라 치부하고 절멸해야할 세대로 생각하는 것은 실상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정치권이 사회를 반영하기
'국민이 죽여놓고 무슨 국민장이냐' 이 말을 기사로 보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들의 썩은 동앗줄 지지도 고팠을 대통령이었구나라는 생각에 더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이러니 무슨 개혁을 시도를 했겠습니까. 정치권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고 나서는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참여했더라도 철저히 그들의 권익을 무시했습니다. 막말로 정치권만 배를 불렸으니 어찌 국민이 외면하지 않았겠습니까. 언론과 야당이 개혁을 막았다고 하는데 정작 개혁의 대상은 자신들을 포함한 모두였습니다.
우리는 정치권을 향해 이야기를 합니다. 제발 부정부패 그만하고 정치권 개혁 좀 하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가장 깨끗해야할 교육현장에서도 숱하게 썩어버린 모습을 봅니다. 막말로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놈들이 정치권에서 해먹는 겁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되며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하고 배운게 도둑질이라서 배운데로 하는겁니다. 우리는 정치권을 향해 비난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 정치권에 있는 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엔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두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착한 일 하시네(시간 많고 돈 많아서 좋겠네)라는 시각과 하나는 착한 일 좋아하시네(병쉰. 돈이 생기냐? 떡이 생기냐?)라는 시각입니다. 괄호안은 속마음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도 없는데 힘없는 이들을 어찌 존중하고 배려하겠습니까?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부조리와 탐욕만이 남은 사회가 되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이용하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의무처럼 보입니다. 안재환, 최진실, 유니, 장자연 그리고 노무현..그들이 가장 비극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 아주 구역질이 납니다. 자신의 물질적 욕망이나 명예욕,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과 자신에 대한 숭배를 바탕으로 타인의 죽음까지 이용하는 사회.
한 사람이 허한 삶중에서 의지하고 있던 단 하나의 끈인 '깨끗한 이미지'라는 상징은 전방위적인 공격으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믿었던 이들도 무섭도록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버팀목이었던 지지층도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사저가 있던 곳은 관광지가 되어 우리안의 원숭이처럼 구경꺼리가 되어갔습니다. 기자들은 파파라치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저 봐라. 인상 졸라 구리구나. 이쪽 한 번 봐주세요.'
인간이라는 것이 자신에 대한 반성보다 남을 비난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일단 남을 먼저 부정하고 그 이후에야 나를 부정합니다. 정치권 탓, 경상도 탓, 전라도 탓, 지역주의 탓, 재벌 탓, 삼성 탓, 이건희 탓, 조중동 탓, 언론 탓, 기독교 탓, 불교 탓, 신문 탓, 고참 탓, 신입사원 탓, 니 탓, 탓탓탁탁탁....아주 손가는 대로 칩니다. 모두가 그릇되고 모두가 잘못되었으니 모두를 부정하자. 단! 나 하나만 빼고.
매일 거듭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길.
박노자는 "작가를 귀하게 만드는 게 노벨상은 아니고, "지구"라는 이름의 정신병원에서 얼마만큼 정신 멀쩡한 사람의 노릇을 해냈는가, 미쳐버린 지 오래된 인류를 약간이라도 "치료"해줄 수 있었는가 라는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세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악하게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지은 죄를 그대로 태중에서 안고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하루 하루를 귀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안타까움과 슬픔은 김뽀글씨의 뻘 짓 - 우리측에선 뻘 짓이지만 그들 측에선 대화 - 한 방에 벌써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담컨대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우리는 우리 밥그릇 속의 쌀알 갯수가 많다적다로 싸울 것이고 내 인생의 불만에 대해 남 탓을 할 겁니다. 좋은 말로 열정적이라고 그러고 나쁜 말로 냄비근성이라고 그럽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어찌되었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용해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산 놈은 그저 사는 수 밖에라고 자조하는 것이 되어선 안됩니다. 기억하고 무엇때문에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새롭게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보면 인간은 문제가 발생하면 왜?라는 질문을 하지만 개미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라는 질문을 한답니다. 매번 누군가의 죽음 후엔 우리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살았을까요? 하루 하루의 삶의 무게를 매일 느끼는 삶을 견디지 못해 잭슨 폴록은 자살했습니다.(사고라곤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지금 나라는 존재를 느끼는 정도의 삶은 되길 기도합니다.
매일 한 걸음씩 선한 삶을 향해 걷길 기도하며 맺습니다.
덧1)
inspired by
capcold님 - 차분한 애도를 위하여
박노자님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면서
bahamund님 - David Foster Wallace
과거에도 좋아하지 않았고, 며칠 전까지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슬프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출신의 한계와 배경의 한계를 뻔히 알기에, 그리고 한국정치 풍토에서 그 배경이라는 것이 족쇄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기에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부터 지독한 회의론적 시각으로 그를 봤습니다. 결과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쥐새끼 ㅈ만큼도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자신은 비록 옳고 집단이 잘못되었더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비난을 받으면 불편하게 마련입니다. 집단과 개인을 일치시켜 다른 집단의 개체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것이죠. 저 역시 한국인이지만 한국 사회를 지독히도 싫어합니다. 단지 정치적인 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교육 등 곳곳에 숨어있는 썩어버린 - 이미 돌이킬 수 없는 - 근성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결국 누워서 침뱉기지만. 1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변화하다.
개인적인 지론이 있다면 '교육으로도 안 되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 고로 삶은 선해지는 과정이다.'라는 겁니다. 한국도 변하고 있지만 서양의 교육 현장에서는 절대 체벌은 없습니다. 말로 해서 안되는 이는 경고를 하고 경고를 해도 안되면 정학이나 퇴학류의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즉 알아서 개선하라는 의미죠. '니 인생 니가 알아서 관리해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한국도 점차 그런 분위기로 바껴졌습니다.
가요의 가사를 봐도 이런 사회적 감정적 분위기의 변천은 뚜렷합니다. 90년대 이전에는 '그대는 누구시길래~'등의 가사였다면 이후에는 '난 알아요.'식의 나를 중심으로 한 감정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그대와 나의 이야기에서 나와 그대의 이야기로 인식체계가 바뀐 것이죠. 내가 중심이 된 사회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밀레니엄 이후 인터넷은 급속도로 퍼지고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하여 젊은 세대들에겐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각과 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정치 풍토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참여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부정이 반복되다.
이런 풀뿌리 정치, 참여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것까진 좋은데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어느 여대생은 늙은 참전 용사들에게 '당신들때문에 통일이 안 됐다'고 악을 쓰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얼룩진 과거 청산, 말은 좋은데 이게 심하다보니 과거에 대한 단절까지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청산, 우리 민족의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인 이 과거를 뇌리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이런 생각은 과거의 모든 행적을 파헤쳐 비난하고 부정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은 고려대 설립자인 김성수를 친일파라 규정짓고, 연세대 설립자인 백낙준의 동상철거를 요구했습니다. 사실 해방 이후 가장 극렬하게 친일파 청산을 들고 나선 단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입니다. 박헌영이 자칭 '인민공화국'을 설립하면서 초대 문교장관으로 김성수를 추대한 일은 유명합니다. 그만큼 김성수나 백낙준은 음으로 독립운동에 많은 지원을 했었습니다. 이런 양면을 보지않고 그저 표면만으로 친일파라 규정짓고 과거를 부정한다면 한국의 모든 대학들은 다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대한 단절과 부정. 2
반성없이 과거를 비난하다.
부모님 세대를 보면 전쟁 이후 폐허에서 지금의 경제규모로 만들어 낸 기적의 세대입니다. 머리칼을 잘라서 가발로 팔고, 환경미화원들이 모은 은행을 팔고, 심지어 중풍치료제인 유로키나제를 모으기 위해 오줌까지 수거해서 수출했었습니다. 전후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놀라는 이들은 전후 한국의 한강의 기적에 몇 십배 경악을 했었습니다. 그런 급속한 경제 발전 이면엔 권력과 기업의 유착이 생기게 마련이었습니다.
이런 과거의 업적을 무시하고 잘못만을 들춰내어 과거사 규명이니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윗 세대가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친일 행적과 권력 유착으로 얼룩져 있는 과거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거에 대한 반성은 우리의 몫입니다. 히틀러 세대가 다 사라져도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반성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제서야 히틀러를 가지고 웃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얼마나 반성을 합니까? 아하! 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부모의 잘못이라구요?
나 외에는 다른 존재가 없나니...
인간이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하면 그 즉시 타인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나 외는 모두가 그릇되고 나 외는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도 포유류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식에의 사랑은 아직도 유지되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죠. '내 아이에겐 최고를 먹인다' '내 아이는 남과 다르다' '내 아이의 그릇됨은 친구 탓이다' 나의 자식만 인정합니다. 그럼 부모는? 부정합니다. 게다가 그 부모는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던 부모입니다. 더더욱 부정해야하죠.
나를 중심으로 내 이후의 역사만 존재할 가치가 있고 과거는 깡그리 무시하는, 경로사상은 20세기 유물이고 늙으면 죽는게 당연한 세상이 됩니다. 노약자석은 노련하고 약은 놈들이 앉는 곳이고 굼뜬 늙은이들은 통행에 방해되니 구석으로 다녀라고 이야기합니다. 전철에서 애들을 나무라면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악을 씁니다. '그 나이 될때까지 차 한 대 없이 뭐 했냐'는 소릴 하는 시대입니다. 이러다보니 초등학교 애들까지 개념 밥 말아먹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구세대라 치부하고 절멸해야할 세대로 생각하는 것은 실상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정치권이 사회를 반영하기
'국민이 죽여놓고 무슨 국민장이냐' 이 말을 기사로 보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들의 썩은 동앗줄 지지도 고팠을 대통령이었구나라는 생각에 더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이러니 무슨 개혁을 시도를 했겠습니까. 정치권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고 나서는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참여했더라도 철저히 그들의 권익을 무시했습니다. 막말로 정치권만 배를 불렸으니 어찌 국민이 외면하지 않았겠습니까. 언론과 야당이 개혁을 막았다고 하는데 정작 개혁의 대상은 자신들을 포함한 모두였습니다.
우리는 정치권을 향해 이야기를 합니다. 제발 부정부패 그만하고 정치권 개혁 좀 하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가장 깨끗해야할 교육현장에서도 숱하게 썩어버린 모습을 봅니다. 막말로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놈들이 정치권에서 해먹는 겁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되며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하고 배운게 도둑질이라서 배운데로 하는겁니다. 우리는 정치권을 향해 비난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 정치권에 있는 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엔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두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착한 일 하시네(시간 많고 돈 많아서 좋겠네)라는 시각과 하나는 착한 일 좋아하시네(병쉰. 돈이 생기냐? 떡이 생기냐?)라는 시각입니다. 괄호안은 속마음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도 없는데 힘없는 이들을 어찌 존중하고 배려하겠습니까?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부조리와 탐욕만이 남은 사회가 되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이용하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의무처럼 보입니다. 안재환, 최진실, 유니, 장자연 그리고 노무현..그들이 가장 비극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 아주 구역질이 납니다. 자신의 물질적 욕망이나 명예욕,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과 자신에 대한 숭배를 바탕으로 타인의 죽음까지 이용하는 사회.
한 사람이 허한 삶중에서 의지하고 있던 단 하나의 끈인 '깨끗한 이미지'라는 상징은 전방위적인 공격으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믿었던 이들도 무섭도록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버팀목이었던 지지층도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사저가 있던 곳은 관광지가 되어 우리안의 원숭이처럼 구경꺼리가 되어갔습니다. 기자들은 파파라치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저 봐라. 인상 졸라 구리구나. 이쪽 한 번 봐주세요.'
인간이라는 것이 자신에 대한 반성보다 남을 비난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일단 남을 먼저 부정하고 그 이후에야 나를 부정합니다. 정치권 탓, 경상도 탓, 전라도 탓, 지역주의 탓, 재벌 탓, 삼성 탓, 이건희 탓, 조중동 탓, 언론 탓, 기독교 탓, 불교 탓, 신문 탓, 고참 탓, 신입사원 탓, 니 탓, 탓탓탁탁탁....아주 손가는 대로 칩니다. 모두가 그릇되고 모두가 잘못되었으니 모두를 부정하자. 단! 나 하나만 빼고.
매일 거듭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길.
박노자는 "작가를 귀하게 만드는 게 노벨상은 아니고, "지구"라는 이름의 정신병원에서 얼마만큼 정신 멀쩡한 사람의 노릇을 해냈는가, 미쳐버린 지 오래된 인류를 약간이라도 "치료"해줄 수 있었는가 라는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세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악하게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지은 죄를 그대로 태중에서 안고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하루 하루를 귀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안타까움과 슬픔은 김뽀글씨의 뻘 짓 - 우리측에선 뻘 짓이지만 그들 측에선 대화 - 한 방에 벌써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담컨대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우리는 우리 밥그릇 속의 쌀알 갯수가 많다적다로 싸울 것이고 내 인생의 불만에 대해 남 탓을 할 겁니다. 좋은 말로 열정적이라고 그러고 나쁜 말로 냄비근성이라고 그럽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어찌되었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용해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산 놈은 그저 사는 수 밖에라고 자조하는 것이 되어선 안됩니다. 기억하고 무엇때문에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새롭게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보면 인간은 문제가 발생하면 왜?라는 질문을 하지만 개미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라는 질문을 한답니다. 매번 누군가의 죽음 후엔 우리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살았을까요? 하루 하루의 삶의 무게를 매일 느끼는 삶을 견디지 못해 잭슨 폴록은 자살했습니다.(사고라곤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지금 나라는 존재를 느끼는 정도의 삶은 되길 기도합니다.
매일 한 걸음씩 선한 삶을 향해 걷길 기도하며 맺습니다.
덧1)
inspired by
capcold님 - 차분한 애도를 위하여
박노자님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면서
bahamund님 - David Foster Wallace
'예전 글 > 날로 먹는 개인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꺼진 뒷골목에서 하는 잡담 (33) | 2009.06.04 |
---|---|
잡담_블로그 유입 키워드를 살피다. (16) | 2009.05.27 |
기억 (18) | 2009.05.25 |
디자이너 in Korea. 내가 쿤타킨테냐? (45) | 2009.05.21 |
호주의 만만디 정신 (17) | 2009.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