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잉여라는 말이 인터넷에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잉여인간이니 잉여짓이니 하는 말이 나도는데, 사실 잉여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남아돈다' '나머지'등의 뜻입니다. 하지만 이 남아돈다는 의미가 인간에게 적용이 되자 사회에 쓸모없는(남아도는) 인간이라는 극히 비하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를 응용해서 수많은 잉여(!!)의미들이 나돌게 되었습니다. 1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워낙에 광대하다보니 그 안에는 별별 인간군상들이 있기 마련이고 별별 희한한 것들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즉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습과 행위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쓸모없는, 잉여생산물이 넘쳐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블로그라는 것이 의외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비하면 일견 얻는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현재의 빠른 정보와 변화가 요동치는 시대에 노력 대비 결과는 약한,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의 취미 활동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블로그의 주제란 것도 워낙 다양하기도 하려니와 글쓴이의 개성까지 강하게 드러내다보니 보기에 의미없는 정보가 대다수로 보입니다.
굳이 블로그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 중 의미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마는. 게다가 블로그는 속칭 개인이 '운영'한다는 특성이 있어서 지목해서 욕을 얻어먹을 가능성을 농후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약간만 글이 마음에 안 들면 '찌질대지마라' '잉여짓꺼리하고 있네'식의 버라이어티한 욕을 얻어먹습니다. 물론 가볍게 즐기기 위해 키치 주제를 다루는 블로그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죠. 개인이 운영하기에 그 운영자, 즉 블로거의 개성과 특성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미디어인 블로그, 그로인해 가장 잉여스러워 보이는 미디어로 인식되는...
과연 블로깅은 잉여짓일까요?
1. 세상에 의미없는 짓은 없다.
피카소가 활동하던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죄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잃었던 시대였습니다. 만약 그의 그림을 당시 한국인에게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잉여쉑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기엔 낙서와도 같은 그림을 그렸던 바스키아는 21살에 자신의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 예술성과 천재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이 세상엔 지금 당장은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시간이 흐른 다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숱하게 많이 있습니다.
2. 기록이 없는 시간이란 없다.
'남는 것은 사진 밖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몇 십년 전에 찍었던 사진에 의해 우리는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회상합니다. 몇 년 전에 썼던 일기를 읽다보면 당시의 내 감정이 어땠는지 내 생각은 어땠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아주 무의미해 보이는 기록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 기록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기록에 의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3. 글쓰기는 창조 행위의 기본이다.
문자가 발명되고 인간이 그 문자를 이용해서 다양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후로 글쓰기는 인간의 창조 능력을 지속적으로 증진시켜왔습니다. 음악이나 미술같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예술 부분을 제외하면 글쓰기는 인간의 상상력을 구체화시켜주는 가장 간편한 창조 행위입니다. 물론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은 문학가로 활동하고 있긴하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창조활동이 바로 글쓰기입니다.
블로그를 운영하다가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블로그에 심하게 중독되어 하루 몇 시간을 블로깅에 빠져있는 등의 모습을 보면 블로깅이라는 것이 시간이 남아돌거나, 정신이 나간 종족들이나 하는 잉여 짓꺼리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없어 보이는, 헛짓꺼리로 보이는 블로깅이라는 행위가 훗날 개개인의 삶을 내밀하게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물일 수도 있고, 예술가의 습작이 될 수도 있고, 천재 수학자의 새로운 공식을 남겨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블로그. 그렇게 잉여 짓꺼리는 아니랍니다.
덧1)
잉여라는 말이 약간 달리 쓰이니깐 참 부정적인 의미가 되는군요. 언어라는 것은 항상 새롭게 바뀌고 진화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블로그도 어떻게 진화해 나갈지 참 궁금합니다 그려.
덧2)
이렇게 글을 쓰고나면 블로그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기록'이라는 행위가 그렇게 잦지 않은 것을 볼 때 - 일기 쓰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단순히 기록적인 측면에서만 블로그를 봐도 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러시아의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잉여인간의 일기'라는 소설이 최초라고 생각된다. 소설에서 잉여인간은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층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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